






visual novel project vol.1
<히키코모리의 외출>
director&writer | jinjoo choe(pearl)
photographer&visual artist | kei
model | sanghyun park
stylist | yungjung lee
title designer | seunghee han
location | cinebooks and everywhere @ hwagok-dong in seoul, korea
prologue
끼이익. 현관문을 연다.
이것은 서바이벌 게임이다.
아니 이건 게임이 아니므로 서바이벌 그 자체다.
내 몸 구석구석의 세포들이 영양분을 원한다.
문을 여니 새로운 공기다. 심호흡을 한다.
당신들만의 세계에서 나는 엄마의 자궁에서 갓 나온 아기처럼 식은땀을 흘린다.
.
Nobody at home
내 이름은 히키코모리. 일본에서 건너온 이름이다. 한국에선 은둔형 외톨이라고 부른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더 싫다. 나는 일본어를 모른다. 동생이 ‘우리 누나 히키코모리야’라고 말하면 그건 그냥 우리 누나가 무슨 일이 있어서 집에 처박혀 있는 것으로 들리지만 ‘우리 누나 은둔형 외톨이야’라고 한다면? 가끔은 외국어를 우리나라말로 바꿨을 때 느껴지는 그 심란함... 은둔형 외톨이라고 정의되는 순간, 왠지 모르게 더 외로워지고 더 창피하다. 나는 내 방에 숨어있다. 그리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아, 은둔형 외톨이 맞구나.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처럼 푹 자다 눈을 떴다. 밤낮이 내 마음대로인 히키코모리에게 숙면은 매우 중요한 삶의 방식이다. 삶의 질을 높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방밖이 이상하게 조용했다. 이상하게 조용하다는 건, 엄마의 한숨 섞인 요리 소음도 언제까지 저렇게 처박혀 있을 거냐는 아빠의 짜증도 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맘때면 동생이 보낸 문자가 깜빡거렸어야 하는데 것도 안 들린다. 한 마디로 평소와 다른 아침이다.
문을 빼꼼 열어보니 역시, 집안에 나밖에 없는 모양새. 그렇다면 지금 화장실을 가도 무방하겠군. 히키코모리의 기본은 집밖이 아니라 방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집이 뭐 대단한 집도 아니고 화장실은 하나뿐이다. 내가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거다. 문에 달린 잠금 고리를 빼고 살금살금 화장실을 다녀왔다. 아무도 없으니 잠시 문을 열어둬도 된다. 히키코모리가 사는 방도 환기는 필요한 법이다. 내 방 창문은 막혀 있은 지 오래다. 히키코모리의 명확한 정의를 모르는 엄마는 내가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는지 창문을 열지 못하도록 막아버렸다.
오랜만에 문 연 채 운동을 해볼까? 두툼한 요가 매트를 편다. 잠잘 때 입는 수면 바지는 상당히 좋다. 땀도 잘 난다. 히키코모리라고 해서 꼭 정적인 것은 아니다. 댄스 동영상을 틀어놓고 요가 매트 위에서 그것을 따라한다. 매트는 반드시 필요하다. 맨바닥에서 뛰면 무릎이 나갈 수도 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다. 히키코모리라도 말이다.
나는 아침운동이 필요한 여자다. 아침에 얼굴이 퉁퉁 붓는다. 일반인 시절-어쩌면 일반인 코스프레였을지도 모를 시절-에 사람들과의 약속은 반드시 오후 4시 이후였다. 과사에서 내 몸을 지분거리던 국문학 조교는 나를 ‘밤의 경국지색’이라고 불렀다. 과거남은 지난밤 절세가인이었던 여자가 아침 해가 뜨면 사라진다며 웃곤 했다. 아침 운동은 부기가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켜준다. 게다가 자칫 여기저기 붙기 십상인 군살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더 이상 외부 사람을 만나지 않지만 그래도 아침 운동은 꼭 한다. 나는 ‘관리’하는 히키코모리다.
평소 같았음 운동하고 바로 씻지 못해 방안에 땀 냄새가 뱄겠지만, 오늘은 땀을 뺀 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수 있어서 기분이 상쾌하다.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며 만화 사이트에 들어가 신간을 체크한다. 문자로 동생에게 주문. 그럼 동생은 궁시렁거리며 동네 만화방에서 책을 빌려올 것이다.
시시때때 문자로 나와 대화해야하는 동생은 최근 내게 스마트폰을 사주겠다며 절절히 요청 중이다. 스마트폰이 한국에 상륙한 건 내가 히키코모리가 된 이후이다. 방안에서 내 핸드폰은 망가질 일도, 물에 빠질 일도 없고, 심지어 쓰지도 않으니 배터리가 잘 닳지도 않는다. 또한 24시간 컴퓨터와 혼연일체가 되어있으니 스마트폰은 필요 없다.
집전화가 울린다. 받지 않는다. 벨이 길게 울리다 끊어진다. 한 번, 두 번. 다음엔 내 핸드폰이 깜빡깜빡한다. 집에 틀어박힌 후 받기 싫은 전화가 몇 번이고 왔다. 결국 벨소리 자체가 싫어져서 무음으로 설정해뒀다. 모르는 유선 전화 번호다.
전화가 계속되었지만 받지 않고, 종료 버튼을 길게 눌러버렸다. 한참 후 다시 켜니 문자가 와 있다.
-씨네북스 책 반납 부탁드립니다.
응? 이게 무슨 일?
문 앞에 쌓아둔 책을 동생이 가져가는 소리를 분명 들었는데? 반납이 안 됐다고?
그리고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몰랐던 유선번호는 만화방이었다.
나는 손톱을 계속 물어뜯다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여기 만화방입니다.”
낯선 목소리. 2년 전의 만화방 주인아저씨 목소리가 기억날 리 만무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부드럽지 않다. 그렇다고 무뚝뚝하지도 않다.
“.......네.”
“연체 너무 오래 하셨거든요? 보셨으면 얼른얼른 갖다 주셔야죠.”
“.....저기...어제 동생한테 반납 부탁해놨는데...반납 안 됐나요?”
“어제 동생 분 오긴 왔는데 책은 안 갖고 왔어요.”
갖다드리겠다, 하고 나는 곧바로 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반납 안 했어?
2시간이 지났는데 대답이 없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잠시 인터넷의 바다에서 빠져나왔다. 여전히 문밖은 고요하다. 나는 살그머니 나와 부엌으로 갔다. 왠지 공기가 이상하다. 아주 깔끔하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여백의 미가 가득하다. 4인 가족 먹여 살리는 냉장고에, 응? 사이즈는 그대론데 용적은 커졌다는 삼성 지펠 대용량 냉장고에, 응? 달랑 케첩과 초고추장뿐이라는 게 말이 돼? 이상하다, 뭔가 심하게 이상하다.
냉장고 문을 닫자마자, 팔랑, 냉장고 문을 열 때는 눈치 채지 못했던 종이가 보인다.
딸, 놀라지 말고 읽어라. 니 동생, 고모 있는 보스톤으로 연수 가기로 한 거 알고 있지? 그거 오늘이다. 누나가 되어서는... 배웅 좀 나와 주지... 아무튼 아들 보내는 김에 우리도 아메리카 구경 좀 하고 오려고 늬 아빠 휴가 냈어. 음식 썩을까 봐 다 버리고 나왔으니까 그리 알고. 아, 김치는 김치냉장고에 있어.
p.s 참, 스마트폰 꼭 사래. 코코넛인지 카페인인지 그거는 외국에서도 쓸 수 있대.
쌀이 없다. 그다지 놀랄 것도 아니다. 엄마는 미리미리 쟁여두는 타입이 아니니까. 쌀이 있더라도 달라질 건 없다. 엄마가 간과한 것은 내가 요리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배달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A starving girl dreams a dream about what?
어느 일요일이었다. 방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은 지 6개월쯤 되었나. 엄마아빠가 어르고 달랬지만 나는 나가지 않았다. 보다 못한 아빠가 문을 뜯어내고 동생이 완력으로 나를 끌어냈다. 거실로 내팽개쳐진 나는 자해를 했고, 응급실로 옮겨졌다. 병원에서 나와 내 발로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고, 이후 아빠는 다시는 내 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딸이 컵라면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웰빙 주부 엄마는 밥을 지어 문 앞에 대령하기 시작했다.
“책방인데요, 어제 오신다면서요.”
“그게...”
“지금 어디신데요?”
“........집인데요.”
“에이 주소 보니까 코앞이구만, 그냥 직접 갖다 주시지?”
“아, 뭐...”
“신간만 계속 빌려 가시면서 반납 안 하신 게 지금 하나, 둘, 셋... 일곱 권이에요!”
“....죄송해요...”
“연체료 안 받을 테니까 얼른 갖고 오세요. 오늘 안 오시면 사장님이 회원 강퇴 시킨다고 옆에서 그러시네요. 그럼 오늘 중으로 갖다 주시는 걸로 알고 끊겠습니다?”
뚝.
어째서 나쁜 일은 혼자 오지 않는가.
뱃가죽이 당기다 못해 위장이 쓰리며,
비록 히키코모리일지언정 이날 이때껏 흠 없이 살아온 내게 블랙리스트의 압박이라니.
짜증을 내며 동생 방에 들어갔다.
문제의 만화책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이 인간은 진짜 깔끔하다.
깔끔한 인간이 반납을 잊다니 이건 어불성설의 시추에이션이다.
굶어죽은 시체로 발견되고 싶진 않다. 블랙리스트도 싫다.
결단을 내려야할 시점이다.
현관문을 열었다.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기를 기도한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기를,
아무도 나를 보지 않기를.
첩보영화의 스파이처럼 비밀스럽게 목적지를 향한다.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만화방에 도착했다. 초딩, 중딩들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썰물처럼 나가는 시점이다. 그들을 피해 반납기 옆에 모로 서 있다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역시 그 목소린 사장님이 아니었다.
가방에서 만화책을 꺼내 데스크에 올려놓았다.
남자가 바코드를 찍더니 흠칫 놀란다.
“드디어 오셨네요.”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죄송하단 의미가 담긴 인사를 꾸벅 하니 눈이 생글생글 웃는다.
그게 왠지 싫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곳은 참새가 그냥 못 지나가는 방앗간이었다.
아니 성전(聖殿)이었다.
일반인인 나는 시험이 끝나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기분으로 1일 이용료를 당당히 지불하고 자리를 잡았다. 자장면도 시켜먹고 주인아저씨가 굽는 김에 하나 더 구워주는 쥐포도 질겅질겅 씹다가 입에 문 채 낮잠을 자기도 했다.
나는 피자를 좋아했다. 치킨은 한 상자만 오면 왠지 부족한 것 같지만 피자는 한 판만 시켜도 받아드는 순간 거창하고 뿌듯하다. 그래서 피자를 자주 시켰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그는 헬멧을 꼭 쓰고 배달을 나왔다. 사회의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 같아서 좋았다. 그러면서도 헬멧 안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남자’같아서 더 좋았다. 피자값 1만9천9백 원 중 5천9백원을 100원짜리와 50원짜리로 섞어서 냈던 날, 맑은 눈동자에서 순간 짜증이 흘러넘쳤다. 동전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순간을 참지 못하고 볼에 뽀뽀를 해버렸다.(내가 미쳤지!) 짜증에서 놀람으로 바뀌는 눈동자 속 감정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복도를 굴러다니는 동전을 같이 주우면서 같이 웃었다. 연애의 시작은 낭만적이었다. 마지막과는 달리, 언제나.
손가락 끝에 미세한 체온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신간 코너 앞에서 길을 막고 옛 생각에 젖어 있었다.
옆을 보니 반납된 책들을 책장에 꽂고 있던 알바생이 또 생글생글 웃는다.
거참. 그 웃음 이상하게 거슬린다.
쇄골과 명치 사이가 간지러웠다.
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정수리 위로 잘 가라는 인사가 쏟아진다.
만화책을 반납했으니 얼른 집에 가자. 그러나 얼마만의 외출인데.
창자가 우르르 쾅쾅 이러다 죽겠다며 소리를 낸다.
마트에 들러 일단 라면을 고른다. 히키코모리는 낱개로 사지 않는다. 통 크게 박스로 산다.
밥도 필요하다. 햇반도 팩으로 산다.
과일을 사고 싶지만 혼자 먹으면 다 물러서 버릴 게 뻔하다.
딱 1초 고민했는데, 눈치 3단 아저씨가 랩을 한다.
“싸요 싸요 새콤 달콤 막달 귤이 어른도 먹고 애들도 먹고 둘이 먹다 코 박고 죽네. 아가씨, 안 사도 돼 맛만 봐봐 먹어보고 뿅 가면 다시 와.”
그렇게 귤 하나를 공짜로 받았다. 역시 공짜는 히리코모리까지도 춤추게 한다.
아까보다 걸음이 느려졌다. 배도 고프고 다리에 힘도 없고 라면은 무겁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놀이터에서 잠시 쉬자. 실은 오랜만에 담배 한 대나 피우고 가야지, 싶었다. 히키코모리 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게 담배였다. 담배를 온라인으로 살 수도 없고 피울 공간도 없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내가 나오지 않은 사이 놀이터는 금연 및 금주 놀이터로 바뀌었다. 아주 청정해 미치겠다. 오늘은 약간의 광합성으로 만족해야겠다.
놀이터는 언제나 햇볕이 잘 들어오는 부지에 자리를 잡는다. 아까 만화방에서 나간 초딩들 여기 다 있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나 하나만이 고요히 광합성을 한다. 축축한 습기가 바짝 마르고 있다. 엄마들이 이불 널어놓고 신나게 패듯 가슴을 두드리면 내 안의 진드기도 사라지려나? 내 안에...있던 진드기가 뭐더라? 내가 왜 히키코모리가 되었던 거지? 결정적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엄청 많았는데.
아직은 차가운 손으로 천천히 가슴을 문지르다가 깨달았다.
내 안에 있던 진드기가 뭐였는지, 기억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 그래서 걸음이 느려졌구나.
배 고프고 힘 없으면 얼른 집에 가서 배 채우면 될 텐데.
그래서 그랬구나.
놀이터에서 나와 집을 향해 달렸다.
라면을 끓여 밥도 말아 먹어야지.
귤도 쪽쪽 빨아 먹어야지.
나는 히키코모리다.
히키코모리였다.
어제까지는.
부른 배를 탕탕 두드리며 오늘 걸었던 길을 되짚어 올 테다.
다시 나의 세계다.
...And I didn't imagine this behind e-mail.
보내는 사람 toughhero@mangaboy.com
받는 사람 hotchickwantu@onlyyadong.com
첨부파일 반납기록 캡처.jpg
제목: 형님한테 술 사
새꺄, 보스톤 졸라 춥다던데.
목욕한 똥강아지마냥 벌벌 떨지 말고 형님 없다고 울지 말고.
히키코모리 갱생 프로젝트 1단계 완료다, 임마!
*이 포스팅은 펄과 케이가 함께 하는 비주얼 노벨 프로젝트입니다.
저작권은 최진주(바람의 머리카락)와 케이에게 있습니다.
상업적 사용을 금지하며, 비상업적이라도 저작권법에 저촉되는 행위라면 지구 끝까지 쫓아갑니다.*
---------------------------------------비밀의 B컷 공개(라고 쓰고, 셀렉 여러 컷해서 포토 괴롭힌 죄책감을 덜기 위한 계책이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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