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열심히 드라마를 볼 수 있던 상황이라,
당시엔 드라마 기사 쓰기가 무척 수월했죠.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
엄마라면 다르게 본다
주말 저녁, 그리고 매일 밤 보게 되는 중독성 강한 한국 드라마. 세간의 주목을 받는 드라마에는 반드시 ‘출생의 비밀’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소재를 다룬 작품을 혹평하지만, 한 아이의 엄마라는 타이틀을 가진 시청자들이라면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을 그저 ‘막장’으로만 보긴 어려울 것이다. 엄마의 눈으로 보다보니 마음속으로 질문이 떠오른다. 만약 내가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
글| 최진주(객원기자)
사진|MBC, KBS
재미: 출생의 비밀, 왜 열광할까?
최근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출생의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기반으로 풀어가는 스토리는 대략 2가지로 압축된다. ‘아이를 잃어버렸는데 알고 보니 이번에 만난 그 착한 아이네.’, 그리고 ‘병원에서 아기가 바뀌었으니 원래대로 되돌리자.’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조연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젠 웬만한 비밀 정도로는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가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런 드라마에 공감하고, 열광하고, 그야말로 욕하면서도 그 시간이면 TV 앞에 앉아 있다는 점이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힘든 역경을 딛고 성공 혹은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열광한다. ‘출생의 비밀’이 한국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 것도 여기서 기인한다. 가장 힘든 상황의 주인공에게 출생의 비밀은 극적인 힘을 실어준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주인공은 복수의 기회, 승리의 기회, 나아가 행복의 기회를 얻는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에 빙의되어 미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반대로 이 출생의 비밀 때문에 주인공에게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 대부분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혈연관계를 꿈에도 모른 채 사랑에 빠졌다가 충격에 휩싸이는 케이스가 많다. 최근 드라마 중에는 <사랑을 믿어요>가 있는데,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사촌 관계인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느끼면서도 감정을 외면하려 노력하는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다.
드라마 제작 환경과 소비 심리 역시 ‘출생의 비밀’을 써먹게 되는 이유 중 하나다. 드라마 왕국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은 드라마를 굉장히 많이 제작한다. 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좀 더 자극적인 아이템이 필요하다. 특히 100회는 기본인 일일드라마를 비롯하여 3개월 이상 방영하는 주말드라마의 경우 자칫 늘어지기 쉽고, 그에 따라 주목도가 떨어져 고정 시청자를 다른 채널에 빼앗길 수 있다. 긴 호흡으로 끌고 가야하는 드라마 특성상 시청자의 관심을 단번에 쏠리게 하는 출생의 비밀은 여러 모로 아주 편리한 소재인 것이다. 게다가 비밀이 대대적으로 밝혀지기 전 곳곳에 깔게 되는 ‘복선’만으로도 충분히 다양한 에피소드가 나오니 더욱 매력적이다. <반짝반짝 빛나는>에서 눈에 띄는 복선은 다음과 같다. 정원 엄마가 임신했을 때 오이만 먹고 살았다는데 정원은 오이를 싫어하고, 오이소박이를 좋아하는 금란이 집 떠날 때 금란 엄마가 오이소박이를 한 상자 만들어 보낸다. 지난해 인기리에 종영한 <제빵왕 김탁구> 역시 출생의 비밀로 다양한 사건을 만들어낸 케이스다. 탁구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매우 예민한 ‘후각’으로 발효 반죽을 찾아내지만, 실제로 비서실장의 핏줄인 마준은 이를 구별해내지 못함으로써 ‘적통’이 누구인지를 암시한다.
출생의 비밀은 현대극이나 정극에서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50회 이상 끌고 가는 사극이나, 시트콤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선덕여왕>(비담이 미실의 아들), <몽땅 내사랑>(김갑수의 딸)이다. (반대로 가정사가 구구절절 나올 필요가 없는 미니시리즈, 단편드라마, 영화에서는 출생의 비밀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나오더라도 초기 설정에 불과하다.)
공감: 우리 아이가 바뀌었다면, 나는 어떨까?
MBC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은 고시촌 식당 딸과 큰 출판사 기업 사장 딸의 뒤바뀜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많은 작품들이 ‘출생의 비밀’ 자체에 반전을 두고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아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반면, <반짝반짝 빛나는>은 초기에 출생의 비밀을 공개했다. 신생아 때 뒤바뀐 삶을 조명하여 두 사람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후 두 사람의 신분을 물리적으로 ‘원상태’로 되돌린 것이다. 이런 경우 대개 사장 딸이 자기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갖은 술수를 다 부리려니~ 예상했겠지만, 드라마는 시청자의 허를 찔렀다. 술수는 식당 딸 금란이 부리고 사장 딸 정원은 몇 번이고 당한다.
이 드라마를 보다보면 우리 마음속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물음표가 있다. '내가 고두심이거나 박정수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자녀를 키우고 있는 엄마라면 누구나 주인공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오래 키울수록 정은 깊어진다. 지금까지 내 자식으로 키웠던 아이를 보내는 것도, 갑자기 나타난 친자식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왔던 딸을 어색하게 대하고, 친딸과 양딸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결국 친딸의 편을 들어버리는 박정수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부잣집으로 가겠다는 딸아이에게 자신의 병을 숨기며 다시는 보지 말자고 말하는 고두심의 마음 역시 헤아려진다.
<짝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기를 손수 바꿔 양반집 자제를 거지 소굴에서 자라게 하고, 자기 아이를 양반으로 자라게 하며 이름도 못 부르고 ‘도련님’이란 호칭을 썼던 천정명의 친엄마. 많은 시청자들이 그녀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간다. ‘우리 아기 얼굴 안 보고는 못 살아!!!’라는 그녀의 울부짖음에 어느 엄마가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기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에게 ‘악역’이란 별명은 붙겠지만, 누구라도 그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했으리라. 여자의 모성애는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누군가의 희생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아이를 보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될 죄책감조차도 감내하며 아이를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싶은 것이 엄마의 마음이다.
조금 다른 설정이지만 <호박꽃 순정> 역시 출생의 비밀을 다룬 작품이다. 야망을 위해 아이까지 버리고 떠난 여인 준선(배종옥)은 성공을 코앞에 두고 이상하게 눈에 거슬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이 갔던 순정이 자신의 딸임을 알게 된다. 왜곡된 욕망을 위해 자신을 사랑한 남자들을 기만하며 살아왔던 악녀이기에 그녀의 모성애는 그저 잠든 딸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눈물 흘리다가 꼭 안아주는 정도일 뿐,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문제: 어째서 늘 가난한 집과 부잣집 아이가 바뀔까?
한국 드라마가 말하는 출생의 비밀은 늘 ‘매우 못 사는 집과 매우 잘 사는 집 아이의 뒤바뀜’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비슷한 소득과 환경의 가정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면 누군가가 ‘내 인생 돌려내!’라고 소리치며 악역을 맡을 필요도 없을 것이며, 어쩌면 두 집이 그 사건을 계기로 어울려 지낼 수 있을 것이고, 두 사람은 형제자매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같은 병원에서 극과극의 소득층이 함께 있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갑작스런 설정 역시 부담스럽다. <웃어라 동해야>의 경우 굉장한 인기를 모았지만 그 스토리를 면면이 들여다보면 민망할 정도로 어설프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반드시 엿듣고, 대대적인 선언을 하려하면 반드시 전화가 울린다. 회장님의 어릴 적 잃어버린 딸 조동백이 알고 보니 동해 엄마(안나 레이커)였다는 결론은 드라마 초기에 정립된 설정은 결코 아니다. 출생의 비밀이 밝혀진 후 동해의 할머니는 동해에게 호텔을 물려주려 하고, 작가는 그들의 당위성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잘해온(중반까지만 해도 능력 있고 성실한 경영자였던) 홍사장과 아들 도진을 ‘알고 보니 파렴치하고 양심 없는 사기꾼인데 이젠 더한 짓도 하려고 해.’라는 식으로 흠집 내기에 열 올렸다.
해결: 착한 드라마를 보자
출생의 비밀은 필연적으로 ‘악역’을 양산해낸다. 가난한 집안과 부유한 집안의 아이가 바뀌었다는 설정은 신분상승, 혹은 하락을 야기하기 때문에 ‘피해’를 보는 입장의 역할은 반드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계략을 꾸미게 되어있다. 그리하여 출생의 비밀과 선악의 대립이란 주제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상적인 소재로 한국 드라마에서 널리 활용되어왔다.
그런데 ‘막장 드라마’라는 오명을 쓰게 된 제작진들의 변명은 조금 황당하다. 주부층을 겨냥하기 때문에 이런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이다. 불륜으로 뒤범벅된 아침 드라마, 이집 저집 툭하면 아이를 잃어버리고 바뀌고 찾아내는 일일 드라마.... 어떻게 보면 이들의 논리는 결국 주시청자인 ‘아줌마’를 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엄마들도 이제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자극적이고 비현실적인 작품을 욕하면서도 계속 본다면 결국 제작진의 해괴한 논리가 사실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찬란한 유산>이나 <내 마음이 들리니> 같은 '착한 드라마'를 더 많이 소비해야 긍정적인 드라마 제작 환경이 정립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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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극복할 순 없는가?
"더 이상 개천에서는 용이 나기 어려운 세상이다. 잘난 부모 밑에서 잘난 자식이 나고, 가난한 부모 밑에선 잘난 자식도 평범해져 버린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해봐야 안 된다는 체념이 사회 곳곳에서 독기를 품어내고 있다. 성적이 안 나오는 것도 취직이 안 되는 것도 좋은 데로 시집 장가 못 간 것도 이제는 다 부모 탓이 됐다. 참 재미없고 시시한 세상이다. 어딘가 마음 둘 데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래서 야무진 막내딸 같은 김연아를 사랑하고 개천에서 용이 나는 기적을 눈앞에서 만들어내는 슈퍼스타K에게 열띤 응원을 보낸다. 판타지가, 꿈이, 희망이 필요한 시대다."
드라마 <반짝반짝 빛나는>의 기획의도를 읽어보면 우리가 드라마 속 ‘출생의 비밀’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수많은 드라마들이 이야기한다. 노력과 인내와 희망으로 위기를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말이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 속의 주인공은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정체성과 인성 등 모든 것이 흔들린다. 동해는 카멜리아 호텔이든 김치 사업이든 신경 쓰지 말고 처음의 목표였던 훌륭한 요리사를 향해 올곧이 나아갔어야 했다. 금란이가 정말 공부 잘했는데도 돈이 없어서 대학에 못 간 것이고 오랫동안 충실히 근무한 서점 직원이었다면, 다른 사람의 기획안을 훔쳐서 출판사 면접 때 내놓지는 말았어야 한다. 인생에 엄청난 행운이 찾아왔든, 엄청난 재앙이 닥쳤든 그것은 하기 나름이다. 사람의 성정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생의 분기점에 섰을 때도 말이다. 출생의 비밀 ‘덕분에’ 성공의 발판을 닦는 것이 아니라 출생의 비밀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성장하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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