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비 소녀, 루돌프를 만나다
산타를 기다렸던 소녀에게 찾아온 건 루돌프. 집안이든 집밖이든 기억 속 루돌프 때문에 소녀의
마음은 따뜻해진다. 언젠가 북쪽 산타 마을로 쳐들어가리라 마음먹은 속눈썹이 긴 밤비 소녀의
크리스마스 스페셜 스타일링.
editor·(최진주)CHOE JINJOO | photographer·LEE WANKI (MODEL), CHOI JAEHOON(ITEM) | stylist·LEE
YUNJUNG | hair & make-up·YURI | model·SONG HYEBIN | cooperation·DREAM TOY(www.
dreamtoy.co.kr), DESIGN TOCTOC(www.designtoctoc.com), ESOPOOM(www.esopoom.com)
BAMBI & RUDOLPH
-언젠가 짝사랑하는 아이에게 선물하겠다고 새하얀 목도리를 뜬 적이 있다.
쉬는 시간에도 꼼짝 않고 떠서 이틀 만에 완성했다. 내가 만들고도 보송보송
부들부들한 것이 너무 예뻐 그냥 내가 두르고 다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 목도리가 없어졌다. 마치 도깨비처럼 뿅 사라져버렸다. 오빠가 두르고
나갔나 해서 난리를 쳤지만 오빠는 아니었다. 범인도 못 찾고, 목도리도 못
찾고, 짝사랑은 시들해진 채 사건은 미결 처리됐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지만,
시간은 내게 망각망각 열매를 주었고, 나는 그 목도리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part 1 집에서 산타를 기다리는 건 빙구 같은 짓

나는 밤비다.
이름은 따로 있지만, 대체로 밤비라고 불린다. 처음엔 싫어했지만 이젠 나도
익숙해져서 누가 “밤비야!”라고 부르면 자연스레 대답해버리고 만다. 별명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옛 남친이 원흉이다. 언젠가 무슨 게임을 하다가 남친이
여친을 업고 빙빙 도는 벌칙을 받게 되었는데 이놈 시키가 빙빙 돌기는 고사하고
나를 업다가 마치 갓 태어난 아기 사슴처럼 양다리가 미끄러지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난 앞으로 고꾸라졌고, 한동안 ‘밤비 여친’으로 불리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별명이 너무 길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밤비’로 불리게 됐다. 겁나
연약하신 남친과는 바이바이한 지 오래이지만, 이 별명만은 내 곁에 남았다.
커다란 지팡이 쿠션을 껴안고 뒹굴뒹굴~♬ 따뜻한 방에 앉아 시간을 때우는 건
정말이지... 행복하지 않다. 오늘은 12월 24일이란 말이다.
어이없게도 모든 약속이 취소되었다. 파자마 파티를 계획했던 멤버들 중 하나는
가족 모임에 끌려가고, 하나는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한테 잡혀가고, 나만 남았다.
하나뿐인 딸을 아주 독립적으로 키우시는 우리 부모님은 이미 크리스마스에
맞춰서 여행 GOGO. 툭하면 놀아달라며 동생처럼 굴던 대학생 오빠는 여친
만나러 갔는지 연락 두절.
‘무적의 솔로부대’이면 뭐하나, 부대원들이 다 같이 있어야 무적이지 혼자 방
구석에 처박혀 있는 게 무슨 무적인가. 어쨌든 부대원1은 배가 고프단 말이다.
하지만 밖에 나가면 커플들이 버글버글 돌아다니는 정경을 맞닥뜨리게 될까 봐
두렵다. 뭐라도 시켜 먹자! 그러나 치킨 집도, 피자 가게도 모두 통화중. 대박도
이런 대박 시즌이 없겠지. 안 되겠다. 요 앞 분식집에라도 가서 뭐든 사와야지.
아 춥다. 패딩도 단단히 껴입고 폭신폭신한 귀마개까지 쏙, 외출 준비 완료. 10분
안에 다녀오자.
분식집 아줌마가 왠지 날 측은하게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
자격지심이겠지. 모른 척 김떡순 3종 세트에 튀김 2천원어치를 추가하고, 마치
여러 명이 같이 먹는 듯이 젓가락도 다섯 개 얻었다.
왜 우리 아파트는 언덕 위에 있을까? 에효효. 떡볶이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걷는데 숨이 차다. 아파트의 우리 동 입구에 겨우 도착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파트 부녀회 아줌마들이 일찍부터 설치며 만들어둔 대형 트리가 번쩍이며
나를 기다린다. 트리 앞에 못 보던 커다란 썰매가 있다. 와아 잘 만들었네~
문방구 앞 교회에서 기증했나? 그런데 동네에서 처음 보는 아이가 썰매에
기대 서 있었다. 늦은 저녁, 모르는 남자아이. 아름답거나 긍정적이라고 하기엔
위험부담이 큰 요소들이다. 하지만 난 이 떡볶이가 식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겠다!
슬금슬금 녀석을 지나쳐 후다닥 올라가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밤비야!”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는 내 별명을 알고 있었다.나를 너무나 잘 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는 아이.어슴푸레 기억의 파편이 뇌리를 스쳐갔다. 내가 아는 사람이었던가.
아니 잘 모르겠는데.
“나야, 루돌프.”
정확한 판단은 안 서지만 이 작자가 미친 건 확실히 아닌 것 같은데.(아님 내가
미쳐서 환청이 들리나?) 크리스마스가 만우절도 아니고 왜 헛소리를 하는 걸까.
그것도 가뜩이나 까칠해진 무적의 솔로한테 말이다. 픽 코웃음을 치며 가던 길을
다시 가려는데 루돌프(라고 주장하는 자)가 내 어깨를 턱 잡았다.
“왜, 내가 루돌프라는 게 안 믿어져?”
돌아보는 내 눈동자엔 분명 불신의 감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왠지 녀석은
삐친 것처럼 입술을 삐죽이고 있다. 솔직히 네가 빈정 상할 일은 아니지 않니?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숨기고 있던 성격이 드러나 버렸다. 나는 대담해졌다.
“입으로만 루돌프입네 산타입네 나불나불대지 말고 썰매라도 태우고
날아보던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루돌프는 우당탕 썰매 안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야, 야, 야!!!!! 소리 지르는 나를 내버려 둔 채 루돌프는 썰매 앞을 지키고 선 사슴
모형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사슴의 코를 톡 건드리자 푸드득 푸드득 마치 숨을
불어넣는 듯 한 마리 한 마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인형처럼 굳어버린 건 오히려 나였다. 녀석은 뭐 이 정도 가지고 놀라느냐는
얼굴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정줄을 놓지 말자.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안 죽는댔어. (근데 이것들은 사슴이잖아… 무려 루돌프라잖아…
흑흑.)
운전석에 앉은 루돌프가 맨 앞의 사슴에게 눈짓을 보낸다.
“루돌프라면서 왜 딴 사슴들 시켜?”
냉소적으로 얘기했는데, 다른 사슴들이 동조한다는 듯 힝힝댄다.
“빛의 속도로 산타마을로 가는 거야?” (정말 가는 건 아니겠지) 키득거리는
내 옆에서 루돌프는 마냥 진지하다. 광속으로 가긴 가지. 하지만 이건 과학이
아니야. 산타도 사슴도 조금씩은 마법을 부릴 줄 알아. 그래야 전세계에 선물을
뿌리고 다니지. 우리 일이 장난인 줄 알았어?
썰매는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엄마야!!!!!!!!!!!!!!!” 내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part 2 용기 있는 자만이 선물을 얻는다

예상은 했지만 밤하늘은 너무 추웠다.
겨울바람이 속력을 타고 얼굴을 마구 마구 때린다.
코를 훌쩍거리고 있으려니 루돌프가 흘낏 쳐다본다.
“좀 따뜻하게 입고 나오지 그랬어.”
아닌 밤중에 썰매 타고 하늘 날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지, 이 사슴아.
루돌프가 입고 있던 갈색 망토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난 사슴이잖아. 망토는 그냥 산타마을에서 복지차원으로 주는 거야. 솔직히 다닐
때 폼도 좀 나고. 산타 마을에 가까워지면 난 사슴으로 변해야 하니까 네가 입고
있어. 부연설명을 하며 털방울이 대롱대롱 달린 끈을 리본 모양으로 묶어준다.
-그리고 너처럼 몸이 맨송맨송한 인간보단 사슴이 따뜻하지.
그래 자랑이다 자랑이야. 털 있어서 좋겠다. 털 없는 나는 목을 움츠려 망토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중얼거렸다.
한참을 달리고 달려 썰매가 멈춘 곳은 산타 마을 입구의 너른 들판이었다. 이건
비밀의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루돌프는 내가 길치라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는 건지 전혀 걱정이 없어 보였다. 썰매 밖으로 발을 내밀다가
헛디뎠다. 아코, 루돌프가 뒤에서 잡아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돌아보니
루돌프는 이미 사슴이 되어 있다. 뭉툭한 입으로 내 스웨터의 소매를 앙 물고
있었다.
계속 말도 안 되는 개그를 치는 사슴, 촐싹거리며 내 주위를 뛰어 다니는 사슴,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사슴… 루돌프도 신이 나는지 다른 사슴과
뿔로 힘겨루기를 한다. 이 비현실적인 장면 한가운데서 정신 차린 배경보다는
정줄 놓은 주인공이 되고 싶어졌다. 난 저마다 다른 아이텐티티를 가진 사슴들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한참 눈밭을 굴렀다. 그러다가 루돌프가 안 보이길래 얘
어디 갔나 두리번거리는데 저쪽 산타마을에서 루돌프가 걸어온다. 이 와중에
나름 친해진 사이랍시고, 반가운 기분이 드는 건 뭐지?
사슴 루돌프가 타박타박 다가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뿔 끄트머리 가지에
은색 반지 하나가 껴 있다. 희고 투명한 눈꽃무늬.
“앗, 이거 나 가져도 돼?”
욕심 많은 나는 반지를 냉큼 빼서 왼손 약지에 끼웠다.(내 별명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업그레이드되었는데, 현재는 ‘놀부밤비’다.)
루돌프가 눈을 깜빡이자, 사람이라면 눈썹 즈음 되는 곳의 부드러운 털을 만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눈과 눈 사이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었다. 하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속눈썹 위에 눈송이가 살며시 내려앉았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내 발 아래의 세상이 온통 눈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모두들 메리 크리스마스!!

돌아오는 길은 정말 신났다.
새로운 경험에 반지 득템까지 기분이 한껏 좋아진 나는 이제 친해진 사슴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초고속 하늘 드라이브를 만끽했다.
고요한 아파트 숲. 어째서 눈이 내리는 밤은 이다지도 조용한 걸까? 수위
아저씨도 잠들었는지 발자국조차 없다. 썰매에서 폴짝 뛰어내려 첫 발자국을
만들어냈다. 킬킬대며 루돌프를 돌아봤다. 루돌프는 처음 만난 그 모습으로 다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녀석의 표정이 한순간 슬퍼 보였다. 왜 그래? 녀석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미안, 밤비 넌 나를 또 잊게 될 거야.”
얘 또 뭔 소리래? 내가 아무리 건망증의 여신이라고 해도 이런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 같은 사건을 잊기야 하겠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웃어넘겼지만, 루돌프는 심각했다.
『원칙적으로 사슴이 인간을 개별적으로 만나는 행동은 금지되어 있다. 이를 어길
시, 등급이 강등된다. 또한 다음해부터 배달 업무에서 제외되며 포장 업무, 주소
엑셀 작업 등 내근직으로 발령된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인간과 교류했을 경우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기억을 지워야 한다.』
루돌프가 보여주는 수첩의 글귀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 순간 나는 녀석이 매고 있던 하얀 목도리를 빼앗아 내 목에 칭칭 둘렀다.
“뭐하는 거야, 남의 목도리를”
.
.
.
“이거라도 갖고 있어야 안 까먹지.”
울음이 나왔다.
“야 이 자식아! 그럼 애초에 찾아오지 말던가! 왜 만나러 온 거야! 남의 기억을
늬들이 뭔데 건드려! 산타면 다야? 루돌프면 다냐고!”
눈물이 쏟아지자, 루돌프의 커다란 손바닥이 엉엉 우는 두 눈을 가렸다. 내
눈물만큼이나 녀석의 체온은 따뜻했다.
“날 잊어버려. 기억하면 안 돼.”
안 잊을게. 꼭 기억할게.
... 그리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눈을 뜨려 하자 무언가가 시야를 가렸다. 만져보니 낮에 내팽개쳐뒀던 지팡이
쿠션이다. 나는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무적의 솔로부대 생활규칙처럼
크리스마스 이브를 꿀맛 같은 단잠으로 보낸 것일까. 거실로 나와 보니 엄마랑
주말에 만들어서 세워뒀던 루돌프가 반짝반짝 빛난다. 아, 요놈 때문에 이상한
꿈을 꿨나보다. 사슴이 나왔던 것 같다. 숙면을 취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헛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끼익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왁자지껄한 걸 보니 딱 엄마다.
“엄마 왔다!!! 아니 얘는 어딜 휘젓고 돌아다녔길래 신발에 웬 진흙에다 얼음까지
잔뜩 묻혀 온 거야?”
이건 데자부일까? 언젠가 엄마가 저런 말을 한 적이 또 있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리고…?
문득, 꼭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처음 보는 반지다. 반지를 싫어하는 내가 샀을 리 없는.
목덜미가 따뜻했다.
잃어버렸던 목도리가 눈꽃 반지와 함께 돌아왔다.
*
밤비 소녀는 루돌프 소년을 다시 만날 것이다.
몇 번이고 기억을 잃겠지만, 기억의 파편을 조금씩 맞춰나갈 것이다.
언젠가 북쪽 나라 산타 마을에 가서 루돌프 녀석에게 말해야지.
또 기억 지우면 가만 안 둬!
------------->You don’t know their small talk.
-뭐하는 거야, 남의 목도리를. 줬다 뺏는 거냐?
-엥? 이거 내가 준 거야?
-속눈썹이랑 목도리랑 닮았다면서 재작년에 줬잖아.
-우리 재작년에도 만났어? 작년에는?
-작년엔 남친이랑 논다고 설치다가 얼음판에서 자빠지는 모습
멀리서 구경했었지.
-악악! 그런 건 좀 잊어달라고!!!
part 3 .....그리고 밤비만 잊어버린 옛날 이야기
BAMBI FORGOT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을 파는 가게 앞에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투명한 창문에 뽀얀 피부가 눌리도록 얼굴을 바짝 댄 채
가게 안에 쌓인 선물을 부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유리창에 누군가가 어른거려 돌아보니,
긴 속눈썹의 여자아이가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
“왜 안 들어가? 엄마아빠랑 안 왔어?”
“아… 난 할아버지랑 왔어.”
여자아이는 방금 엄마를 졸라 산 붕어빵을 품속에서 꺼냈다.
“이거 먹을래?”
남자아이는 붕어빵을 손에 들고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창문 안에서 엄마가 여자아이에게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여자아이가 다급히 속삭였다.
“따뜻할 때 먹어야 한다구! 얼른 먹어!”
남자아이는 얼른 한 입 물어뜯어 조심조심 삼켰다.
“안녕, 다음에 보자.”
여자아이는 손을 흔들더니 들어갔다.
남자아이도 속으로 말했다. 안녕, 내년에 보자!
여자아이는 카드를 고르다가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남자아이는 저 멀리 배불뚝이 할아버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문득 남자아이의 콧등이 유난히 붉었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산타가 될 수 있다.·
STORY BY 바람의 머리카락
덧글
흑흑 회사 사정으로 접은 거라... 이젠 나오지 않아요 엉엉
언젠가 더 재미난 걸 만들 테니 꼭 읽어 주세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