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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사랑 / 서양미술사/스캔들/뮤즈] 존 에버렛 밀레이 & 에피 러스킨 러브스토리-<문화공간>(세종문화회관 월간지) 2013년 3월호 *최진주 기자의 레알 기사* 아티스트(예술가의사랑)


존 에버렛 밀레이와 에피 러스킨



친구의 아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고 그녀와 정을 통했다면 여지없이 그 화가는 천하의 몹쓸 놈이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언뜻 보면 막장드라마 같은 스토리가 분명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국에서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던 존 에버렛 밀레이와 그의 멘토였던 평론가 러스킨, 그리고 그의 아내 에피. 세 사람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글_ 최진주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다
존 에버렛 밀레이는 어릴 적부터 늘 격한 찬사를 받아왔던 신동이었다. 왕립 아카데미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했으며 재학 당시 모든 상을 독차지했다. 누구보다 출중한 실력과 감수성을 겸비한 그가 당시 미술계에 만연해있는 상투적인 형식을 따를 리 없었다. 그리하여 청년이 된 밀레이는 뜻을 같이 하는 젊은 화가들과 함께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 이전처럼 순수하고 심오한 미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로 ‘라파엘 전파’를 결성했다.

젊은 화가들의 이러한 비판적인 의지는 기성 화가들과 평단의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때 평론가 존 러스킨이 라파엘 전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도움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밀레이와 러스킨 부부는 서로 왕래하며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이들의 사이는 러스킨 부부의 여행에 밀레이를 초대할 정도로 돈독해졌는데, 이 순수했던 초대가 밀레이와 러스킨, 그리고 러스킨의 아내 에피, 세 사람의 운명을 소용돌이로 몰고 가게 될지는 그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코틀랜드의 계곡으로 놀러갔던 여행에서 밀레이는 에피에게 모델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에피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린 후, 그는 같은 라파엘 전파인 친구 홀먼 헌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를 언급했다.

“오늘 러스킨 부인을 그렸어. 지금까지 신이 창조한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라고 생각하네.”

밀레이가 처음 에피를 두고 그린 작품은 바로 1853년작 <1746년의 방면 명령>이다. 남편을 구해내기 위해 권력자에게 몸을 바치는 아내의 모습. 그림 속 여인은 남편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행복해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에피는 그리 행복한 결혼생활을 누리고 있지 못했다. 관찰력이 남달랐던 밀레이의 눈에도 숨겨진 모습이 보였으리라.

(밀레이가 그린 에피의 초상화)
(밀레이가 그린 에피 스케치)

(밀레이의 자화상)


불행한 유부녀, 사랑에 빠지다
법률가 집안의 딸로 태어난 에피는 처녀 시절 지극히 우아한 외모와 함께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과 착한 성정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여인이었다. 그 자신이 활발한 성격이었기에 신중하고 논리적인, 자신과는 조금 다른 남자 존 러스킨에게 마음이 갔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일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장단점을 맞춰가며 잘 지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에피와 러스킨의 결합은 불완전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 사람은 행복한 부부처럼 지냈지만, 그것은 사실 연기였다. 러스킨은 결혼 후 6년간이나 에피와 부부관계를 갖지 않았다. 러스킨은 아이가 싫고 임신과 출산 때문에 아내가 건강을 해칠까 봐 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실제로 존 러스킨에게는 심리적인 장애가 있었다.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질 때 이미 ‘성인’인 그녀의 몸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러스킨은 첫날밤 이후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더라도 아이만 보고 사는 여자들이 꽤 많지만,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에피에게는 아이라는 축복조차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는 엄격한 사회적 분위기였기에 남편과의 잠자리에 대해 왈가왈부하거나 고민 상담을 시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에피는 그저 괴로움을 안으로 삭이며 조강지처의 역할만 묵묵히 하고 있었다.

이렇게 슬픈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일상에 새로운 자극이 찾아왔으니, 바로 남편의 친구인 존 에버렛 밀레이였던 것! 밀레이는 그녀의 우아한 외모와 성정에 찬사를 보내며 그녀를 백작부인이라고 부르곤 했고, 에피는 밀레이를 가운데 이름인 ‘에버렛’이라고 부르며 그와 남편을 구분했다.

그녀는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금방 밀레이와 친해졌다. 그림을 배우기도 하고 캔버스 앞에서 모델로 서면서 에피는 자신의 마음속에 밀레이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밀레이를 바라보노라면, 불행한 결혼생활이 잠시나마 잊혀지는 기분이 들었다.

밀레이는 러스킨과 극명히 대비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냉철하고 음울한 면이 강했던 러스킨과는 달리, 밀레이는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분위기 메이커였다. 여기에 성격도 활달하고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는 활발한 면모를 보였다. 말하자면 에피가 원하는 이상적인 남성, 그 자체였다. 밀레이 역시 에피를 향한 열정이 점점 끓어올랐기 때문에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그는 친구를 배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둘 사이에서 피어나는 연정을 모른 척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1853년 그녀로부터 친구 러스킨이 아내를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지 듣게 되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결국 에피는 부모님께 결혼생활의 비밀을 폭로하고 친정으로 돌아간다. 결혼 6주년이 되던 날, 그녀는 결혼반지를 집 열쇠와 함께 러스킨에게 돌려보낸다. 그리고 결혼 무효 소송을 내기에 이른다. 교회 법정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고, 러스킨 부부는 법적으로 이혼하게 된다. 당시는 크리미아 전쟁이 막 발발한 때였는데, 러스킨 부부의 결혼 무효 소송은 전쟁 뉴스를 밀어내고 톱기사가 될 정도로 흥미진진한 스캔들이었다.

에피에게 깊이 빠져들고 있던 당시, 밀레이는 러스킨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실제로 이 그림이 완성되던 해 러스킨 부부의 결혼은 무효화되었고, 이듬해인 1855년 밀레이는 에피와 결혼했다.

(1854년. 밀레이의 사진.)
(1873년의 에피. 초상화.)

일상의 행복은 창조력을 키운다

사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에피는 남편이 ‘성불구자’라고 주장했고 그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가장 치욕적인 방식으로 아내를 빼앗긴 러스킨. 하지만 그는 39세에 10세 소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가 18세 되던 해 청혼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는 못한다. 에피와의 결혼생활과 이 사건의 연속으로 역사가들은 그가 소아성애자(어린 아이에게서만 성욕을 느끼는 심리)였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문제 때문에 파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아내와 친구가 결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러스킨은 밀레이에게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밀레이는 러스킨과의 우정보다 에피를 향한 사랑이 더 중요했다. 특히 에피를 수년간 고통 속에 빠뜨렸던 러스킨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여 합법적인 부부가 된다. 사실 러스킨이나 호사가들 입장에서는 밀레이와 에피 역시 불행해져야 속이 시원하겠지만, 두 사람은 아들딸 낳고 40년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은 기쁨과 환희는 밀레이의 재능과 실력을 가히 폭발적으로 업그레이드시켰다. 밀레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성 아그네스의 전야>를 보면 밀레이의 에피에 대한 사랑이 가득 느껴진다. 한기가 가득한 밤중에 그림을 그리느라 손끝이 곱아 힘들었지만, 무려 5일만에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지극한 사랑 때문이리라.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여주인공의 모델은 다름 아닌 아내 에피다.
게다가 전 남편 러스킨과는 달리 밀레이와 에피 사이에는 무려 4남4녀의 자식들이 있었다. 두 사람의 부부금슬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밀레이는 에피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무척 사랑했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부터는 아이들을 모델로 삼아 많은 그림을 그렸다. 특히 연작 시리즈인 <나의 첫 설교>와 <나의 두 번째 설교>는 밀레이의 대표작으로서 밀레이 부부의 스캔들이 사그라들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 처음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다섯 살배기 딸 에피(밀레이는 딸에게 아내의 이름을 붙였다!)의 모습은 그야말로 깜찍한 꼬마숙녀 그 자체다. <나의 두 번째 설교>는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표현한 전작과는 달리, 아이가 설교를 듣다가 졸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작품. 이 그림이 왕립 아카데미 전시회에 공개되었을 때 대주교가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오늘 유익한 교훈 하나를 배웠습니다. 아주 우아하게 주무시는 작은 숙녀 한분이 길고 지루한 설교가 얼마나 악한 것이지 똑똑히 가르쳐주시네요.”
젊은 시절의 밀레이가 기성 화가들에게 반기를 들고 기존 양식을 거부하느라 대중성을 갖지 못했다면, 즐거운 결혼생활을 지속하면서부터 밀레이는 대중적인 감각을 무의식중에 갖게 되었다. 한마디로 에피와 결혼한 후 밀레이는 승승장구했고, 사회적인 인지도와 물질적인 부, 작품성 모두를 거머쥐었다. 특히 다채로운 주제와 화려한 테크닉은 그를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 아카데미 화가의 자리로 이끌었다. 1896년에는 왕립 아카데미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화가와 모델, 백년해로하다
비록 에피가 법정 소송에서 이겼고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녀의 편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친구의 아내 그리고 남편의 친구와 정을 통했던 것은 사실이기에 두 사람을 향한 세간의 시선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화가로 밀레이가 후보에 오르자 격렬하게 반대했다. 밀레이가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유부녀를 유혹해 아내로 삼았다는 스캔들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물론 빅토리아 여왕도 나중에는 그에게 준남작의 지위를 내릴 정도로 밀레이의 실력을 인정했고 인간적으로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지만, 밀레이의 아내 에피에게만큼은 매우 냉혹하게 대했다. 예를 들어 밀레이는 영국 사교계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많은 행사에 초대받곤 했는데, 여왕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 에피는 참석할 수 없었다. 또한 두 사람의 딸들이 성장하여 사교계에 처음 나서는 첫 무도회에도 엄마인 에피가 자리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에피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피를 곁에 두고 사랑하면서도 밀레이는 그녀의 사회적인 입지에 해를 끼쳤다고 자책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죄책감은 40년이나 지속되었다. 밀레이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게 시종을 보냈다. 도울 일이 없는지 여왕을 대신해 묻는 시종의 앞에서 밀레이는 힘없는 손을 들어 석판에 ‘여왕 폐하께서 아내를 만나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고 썼다. 여왕도 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에피는 드디어 여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 비록 눈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늙고 병든 후였지만, 밀레이는 그런 에피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마지막 간청을 했던 것이다. 사랑하라, 사랑을 위해선 무엇이든 해라.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다. 200년 전의 화가가 현재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1746년의 방면명령>1852년작.

<오필리아>1852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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